그간
宗中 家家에 出生, 婚姻,
別世, 前譜의 漏落事由
等을 補完 改訂하여 새 族譜를 發行토록
要望하는 一家가 많아 三年余에 걸쳐 準備와
收單, 編輯을 마쳐 本譜의 刊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特別히 잘 發達된
族譜制度는 外國에서는 一部 王侯貴族을
除外하면 類例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서
先進各國에서는 이것을 높이 評價하고,
學術的 硏究對象으로 삼고 있는 境遇도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時代의 變遷에
따라 族譜에 對한 價値認識이 크게 變化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族譜가 一身의
立身出世와, 나아가 家門의 榮達 乃至
誇示의 道具로 쓰인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옛날과 같은 氏族間의 差等이나
班常, 貴賤의 差別이 있을 리가 없고,
個人의 社會的 地位는 그의 能力과 努力에
依해서 얻어진다는 것이 現實입니다. 그러나
이 時代에 族譜를 作成하여 永久히 記錄으로
남기는 것은 오히려 더 重要하고 緊急하다고
할 것입니다. 지나간 一百年, 즉 二十世紀가
어떠한 時代였나를 돌아다보면, 科學文明과
産業의 爆發的 發展, 人口의 急增 等 人類의
數萬年 歷史에 比較할 바가 되지 않는
激變의 世紀라고 할 것입니다.
안으로
우리나라의 歷史를
보면 周邊列强의 角逐속에서 三十五年間
失國의 痛恨을 맛보았고, 光復에 뒤이은
國土分斷과 東西冷戰의 틈바구니에서 同族相殘의
悲劇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西歐文明의
導入과 刻苦의 努力으로 이제는 先進國의
문턱에 到達하여 社會文化는 急速히 變化되었고,
祖上崇拜의 傳來美風은 크게 褪色하였고,
家族과 一家의 槪念도 크게 退化되었습니다.
戰禍와 貧困으로 因한 家族離散, 海外移住
等 孤兒가 되어 父母兄弟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는 反面, 一部에서는 物質的享樂을
追求하고 家庭과 家族, 나아가 一家親戚의
意義를 無視하는 傾向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祖上의 後光을 빌지 않고, 또한 一家親戚의
不當한 도움을 期待하지 않고 스스로 努力하는
것과, 自己를 낳게 해주신 先祖와 後孫,
그리고 모든 血族과의 關係를 記錄 保存하는
것은 결코 相反되는 것이 아닙니다.
二十一世紀는
情報化의 時代입니다. 이미 地球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大小의 現狀들이 實時間으로
傳達되고, 有名無名의 많은 人士의 行蹟이
낱낱이 記錄되고 있습니다. 우리 閔門은
말할 것도 없이 高麗朝, 朝鮮朝를 거쳐
現代에 이르기 까지, 始祖로부터 單一本貫으로
綿綿 三十余代를 이어오면서 오늘날에는
그 子孫의 總數가 國內에서만 十六萬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代代로 名臣 碩學으로
盛名을 얻은 분은 數를 헤아릴 수 없으며,
朝에 들어서는 忠節을 다하고, 집에 있어서는
孝悌의 龜鑑이요, 또한 仁義禮智의 德을
쌓아 修身持己하였으므로, 閔姓을 가진
者, 男과 女를 가림이 없이 先祖의 高德을
追慕하고 家門의 榮譽를 생각지 않은 者가
있겠습니까. 閔門끼리 初面으로 對하였을
때 서로 派와 世居地를 대면 十年知己와
같이 됨이 또한 族譜의 效用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新譜 編纂에 있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三年餘에 걸쳐 弘報와 個別通知,
派別連絡等 各方으로 努力하였음에도 不拘하고
모두가 함께 參與하지 못한 점과
國土分斷으로 以北同族의 消息이 杳然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相當數의 門中이 中國,
日本, 美洲等地에 永住하고 있어서, 이
問題는 次期의 宿題로 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電子技術의 發達普及에
따라 이번 族譜에서는 처음으로 CD-ROM族譜가
作成되어 여러 장의 影像資料와 함께 族譜의
保全, 利用의 便이 크게 向上되었기를
期待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