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제삼파(○○○○氏第三派)가
十七년전에 기미보(己未譜)를 간행하고
이제 병자년(丙子年)에는 파조(派祖) 휘(諱)
영화(永和) 득재(得財) 희서(希諝) 그리고
은덕재(隱德齋) 후손 모두가 수록(收錄)된
병자보(丙子譜)를 발간하게 되는 것을
치호(致鎬) 종손을 위시한 만종원(萬宗員)과
더불어 경하(慶賀)하여 마지않는 바다.
족보는
보통 매(每) 三十年마다 간행하는 것이
통례(通例)로 되어 있다. 그런 통례로
보면 금년의 병자보(丙子譜)는 약 十二년이
빠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장(會長)인
나의 입장에서 말하라면 오히려 二十여년이
늦은 감(感)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전번 기미보(己未譜)를 ○○○씨제삼파대동보(○○○氏第三派大同譜)라고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三파를 망라(網羅)한
대동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감사공(監司公・安川君)파중의
최대파인 취우정파(聚友亭派)가 가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미보 간행시(刊行時)
본인은 회장의 입장에서 합보(合譜)를
위하여 수삼차(數三次) 왕래하면서 합보의
당위성(當爲性)을 역설(力說)했으나 사정상
대동보로의 합보를 성사(成事)시키지 못하고
분보발간(分譜發刊)에 그치고 말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의 족보 간행은 오(吾) 제三파로서는
크게 경하(慶賀)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소윤공파(少尹公派)에서의 二백여호와
참의공파(叅議公派)의 二백여호가 중간(中間)
누락(漏落)에서 금반(今般) 입보(入譜)하게
된 것등 다행한 일이 많은 뜻 깊은 간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종전(從前)의
간행은 주로 연고항고(年高行高)하시고
과거보(過去譜)때부터 이력(履歷)이 있으신
어른들이 도유사(都有司)와 총무(總務)
재무(財務) 교정(校正) 등을 분담하여
특정장소(特定場所)에 보청(譜廳・譜所)을
차리고 종회사무진(宗會事務陣)과는 별도의
입장에서 간행해 온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유사 등 별도의 인선(人選)이나
보소(譜所)를 차리지 않고 종회사무소(宗會事務所)안에서
회장이 총책임을 맡고 그 밑에 부책임자(副責任者)
한 사람만을 두고 총무와 재무는 종회의
총무 재무가 겸무(兼務)를 해서 예하(隸下)
각파(各派)의 책임자들과 긴밀(緊密)한
연락하에 간행을 진행시켜 왔다.
과거와
금차(今此)와는 각각 장단점(長短點)이
있어서 구태어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대동합보(大同合譜)가
된 것뿐 아니라 인원 경비기간 누락자복귀(漏落者復歸)시의
잡음(雜音) 소지(素地) 등을 공개리에
회장단회의(會長團會議)를 통하여 중지(衆知)를
모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처리한 점등은
공지(公知)하는 바요 특히 선진(先進)한
타보(他譜)의 장점채택(長点採擇)이나
내용의 정확성(正確性)과 제본의 우수성(優秀性)
가격의 적정성(適正性) 등등은 평가(評價)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思料)된다.
족보문화(族譜文化)는
특히 오민족문화(吾民族文化)의 선진우수성(先進優秀性)을
세계에 과시하는 바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등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의 자랑거리인바
이번에 대타성(大他性) 어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대동보(大同譜)를 내놓게
된 것을 거듭 자경자하(自慶自賀)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간행과정(刊行過程)을
통하여 특기할 일은 부책임을 맡은 ○○부위원장(○○副院長)의
노고이다. 불초(不肖)는 방침(方針)과
책임(責任)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를 ○○보(甫)가 수고했으며
그는 최적임자(最適任者)로서의 성심(誠心)과
능력(能力)으로 헌신봉사(獻身奉仕)하였으니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밖에
예하 각파의 유사(有司)와 실무(實務)에
임(臨)한 여러 임원들의 노고(勞苦) 또한
컸음을 잊을 수 없는 바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미보(己未譜)때
제보결의(除譜決議)되었던 종원(宗員)의
보사(譜事)를 이번에 복구시키지 못한
점이다. 그 당시도 불초(不肖)가 회장직에
있을 때의 일이라 서문(序文)에서까지
언급했던 일인데 十七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재리(財利)문제가 중간에 끼었던 시비관계(是非關係)라
혈족(血族)의 의리(義理) 설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이번 병자보(丙子譜)에
환원되지 않았다. 회장인 나로서는 은근하고
부단한 노력을 해 보았으나 이해관계(利害關係)를
초월할 수는 없었다. 이는 불초 본인의
역부족(力不足)과 부덕(不德)의 소치(召致)로
돌리면서 차기(次期) 수보(修譜)전에는
미리부터 서로 대책(對策)을 논의하고
피차가 약간씩의 양보(讓步)를 해서 서로
후회(後悔)없는 복귀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저간(這間)
十七년간 예하 각파에도 여러 부면(部面)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대종회본부(大宗會本部)에도
양도공파종회(良度公派宗會)에서 그 상대(上代)에서
분파(分派)된 모든 三파를 통합한 제삼파대종회(第三派大宗會)를
탄생시킨 일과 양도공선조의 부조묘(不祧廟)를
이건(移建)한 일 그리고 한때 주변 다수인의
항의와 욕급조상지불효막급(辱及祖上之不孝莫及)의
만행사(蠻行事)를 가라 앉히고 치산(治産)과
종회관(宗會館)을 건립(建立)하고 주위환경(周圍環境)을
소박(素朴)하게나마 정리하여 시흥성지(始興聖地)를
삼안공원(三安公園)으로 칭(稱)하도록
한 것이 조그만 업적(業績)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관향지(貫鄕地)에도 화수회(花樹會)
주간(主幹)으로 시조사단(始祖師壇)을
이건(移建)한 것을 위시하여 대산단(大山壇)
건비사(建碑事)와 사현정(四賢井) 주위정비(周圍整備)와
은덕재(隱德齋) 치산(治山) 및 재실보수(齋室補修)를
작년에 마치고 금년 九월에 三천여만원의
예산으로 봉모재(奉慕齋) 수축(修築)을
완료하였으며 그밖에 五억원 기금(基金)으로
매년 四천여만원씩의 장학금(獎學金)을
후손 자녀학생에게 지급하는 일과 용산(龍山)과
봉천동(奉天洞) 소재 三개건물의 임대과실(賃貸果實)로
부조묘향사(不祧廟享祀)와 산소봉제(山所奉祭)와
더불어 종손(宗孫)의 생계지원(生計支援)
및 종회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장차 三개건물중의
개축(改築)을 위하여 약간의 기금(基金)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사(多幸事)이다.
이에
자칫하면 과소진후(過消盡後) 부채종회(負債宗會)가
될 뻔 했던 수년전사(數年前事)를 회상하면
「종사(宗事)는 불여탄탄(不如坦坦)」이란
만고(萬古)의 철칙(鐵則)을 강조하고 아울러
문정선조고(文貞先祖考)와 문성방선조(文成傍先祖)
산소(山所)에 성묘(省墓)할 수 있는 대망(待望)의
남북통일(南北統一)의 그날을 소원하면서
오종가(吾宗家)와 좨주(祭酒) 문숙(文肅)
소윤(少尹) 감사(監司) 四파의 만종원(萬宗員)의
무궁한 번연(蕃衍)과 발전을 기원하면서
간행사(刊行辭)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