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門이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한 것은
조선조 숙종 갑술년 서기 一六九四年의
일이었다. 이후로 지난 임술년 一九八二年에
이르기까지 약 三百年 동안에 모두 여덟
차례 重刊이 되었는데, 始刊譜에 실린
후손 敏琦가 지은 序文과 昌命이 쓴 跋文을
보면 당시에 大同譜를 처음 간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個體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득한 옛날 始祖로부터 역대 조상을
거쳐 자신에 이르고, 다시 길이 자손으로
이어지는 連鎖의 한 고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 國史가 있듯이
家門에는 족보가 있어 氏族의 뿌리를 찾고
그 전통을 이어받게 되는 바, 시조 이후
連綿히 이어오는 吾門의 빛나는 전통에
대하여는 여기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번 甲申譜 간행은 이전의
重刊 때보다는 그 意義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源仁齋를 시조 묘소 옆으로
移建하고 齋舍에 譜所를 개설하여 처음으로
대동보를 간행하기 때문이요, 또 情報化·世界化
시대로 일컬어지는 二十一世紀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吾門의 位相을 再定立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요즈음의 世態를 살펴보면 기대와 신뢰보다는
우려와 불안을 안겨 주는 사태가 사회
도처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 우리의 앞길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 목전의 현실이다.
고도산업화사회의 여파로 온 세계가 물질만능과
무한경쟁의 시대로 변해가면서 인간경시
풍조가 세상을 휩쓸어, 윤리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새로운 가치관은 형성되지 못한
채, 특히 핵가족화가 만연되고 戶主制가
흔들리는 가운데,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과
祖先奉祀의 근간이 송두리째 파손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각박한 非人間化 시대, 치열한 경쟁 사회의
與件下에서 우리는 이 甲申譜를 간행한다.
생각컨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우리 宗人끼리는 상호갈등과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친애와 화목의 대상이어야 하고,
사회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우리는 한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서로가 협조하고 의존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할 단체다. 다만 도도히
흐르는 변화의 물결에 적절히 순응할 방안을
지속적으로 연구 실천해야만 다른 氏族에게
모범을 보이는 빛나는 가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이 갑신보 간행을 계기로 하여
宗會의 운영도 현대화할 분야는 과감하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종회에
이미 개설되어 있는 홈페이지와 이메일의
이용을 활성화함으로써 젊은 세대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宗會를 長老들의
회담 장소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활발한
토의·토론의 場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 앞으로 족보의 편찬 내용을 전산화하여
보관과 열람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이요,
源仁齋를 젊은이들의 연구수련의 교육장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무릇 家門은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것이 자랑이겠지마는 그보다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야만 더욱 빛나는
것이니, 宗中 長老들은 젊은 後代들을
올바르게 敎導하여 그들에게 ○○○氏라는
긍지를 심어줌으로써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가 되게 하는 일에
宗事의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라고 서양의
역사학자가 말했는데 이 말을 援用한다면
氏族의 역사인 족보는 조상과 후손들과의
대화의 광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조상의
얼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일에
족보 간행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갑신보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역대 조선들의 처가와 외가의
譜牒을 비롯해 일반 史書까지도 널리 참고함과
李氏姓을 가진 경위를 재조명하고 先代에
李許 複姓을 사용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국사편찬위원회의 考證을 받아 삭제한
것과 그동안 得姓祖의 諱字 解釋에 대한
紛紛했던 異說들을 明瞭하게 有權 解釋하여
定立하였음은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吾門 발전에 宗人들 특히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면서 소회의 일단을
서술함으로써 序文에 갈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