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란
같은 氏族의 始祖로부터 父系를 中心으로한
同族의 世系와 代世間의 行列序次를 나타내는
譜牒으로서 族譜編纂 당시의 子孫에 이르기까지를
收錄하여 編纂한 冊卷을 말하며 一名 世譜
또는 宗譜라고도 하나 어디까지나 代世와
次序를 分明하게 함으로서 昭穆을 分別하는데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이번
甲申譜를 編纂함에 있어서 우리 氏族의
收族之義를 도모하고 正體性을 確立하고자
무엇보다 正確性을 밝히려고 現存史料와
관계 文獻 및 金石文 등을 涉獵하여 典據하였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族譜編纂史上 처음으로
審議機構를 常設化하여 가동함으로써 審議委員들의
眞摯한 硏究태도와 노력이 한층 돋보였으며,
특히 ○○○ 국사편찬 委員長님의 열정적인
자문과 자상한 지도에 힘입은바 至大하였을
뿐만 아니라 國事에 바쁘심에도 文忠公
墓誌銘을 踏査하기 위하여 現地 日本東京大學工科大學部에
所藏된 誌石을 直接 確認하고 많은 誤,
脫字등의 補正과 解讀을 도와주었으며,
國學者이신 ○○○님의 도움으로 甲申大同譜
序文을 明快하고 바르게 엮게 되었음은
무엇보다 큰 성과이었으므로 지면을 빌려
두 분의 노고에 鄭重한 謝意를 드리는
바이다.
그동안
始刊譜以來 막연하게 李許複姓문제를 비롯하여
得姓祖이신 邵城伯의 事蹟과 本貫祖 邵城侯에
대한 기록을 慕華的으로 또는 事大的으로
偏向되게 확대해석된 기록을 줄곧 踏襲해왔으나
이번에 三國史記, 고려사 문충공 묘지명
등의 뒷받침과 국사편찬위원회의 考證으로
李許複姓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라든지
특히 得姓祖이신 新羅 大官 奇字平 鼻祖께서
당나라에 使臣으로 가시어 李氏姓을 賜姓
받으시고 신라에 돌아와 邵城伯과 食邑
一千五百戶를 景德王으로 부터 받은 것으로
정리된 것 등을 더 없이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겠다. 다만 그동안 잘못
전해지고 기록됨으로써 마치 唐 玄宗이
邵城伯의 작위와 식읍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一部의 見解들에 대하여도 차제에 말끔하게
밝혔는바 앞으로 착오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壬戌譜와 크게 달라진 내용을 특기하는바
先代의 어른들께서 역사적 고증이나 방증없이
틀린 기록들을 옮겨 넣은 上代의 配位
할머니들의 爵號를 바로잡았고, 제학공
휘漸을 年代가 맞지 않아 二代를 올린
것과 시랑공계의 璜을 一代 내리고 定州派의
弼이 一代를 내려 바로잡은 것 등은 刮目할만한
성과이었다.
그리고
쌍명재공의 동생으로 纘之와 아들 囷을
東國李相國集에서 찾았으며 특히 安靖公
孝常의 配位를 光州盧氏 知司諫院事 尙禮의
딸로 밝혀낸 것 등이 가장 뚜렷한 심의위원회의
성과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밖에도 뚜렷이
표출된 몇 군데를 바로잡아 註釋으로 傍註하였음도
밝혀둔다. 그러나 아직도 바로잡아야 할
기록이 상당부분 散在해 있음이 확인되었음에도
문중간의 민감한 사안들이 잠재되어 있음을
勘案하여 후손들과 후학들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기어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긴 세월을 遠代孫으로만 내려왔던 忠剛公파의
一族을 甲申正譜에 入譜하게 된 것을 크게
환영하면서 기쁘게 생각하는 한편, 兎洞파와
伏雉파간의 오랜 분쟁의 조정이 안 되어
마침내 伏雉파 一族이 脫譜해 버리는 유감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시중공파의 報恩一族들의 끈질긴 移籍요구에도
불구하고 要件이 성숙되지 아니하여 청납되지
못하였음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다.
때마침
사회일각에서는 호주제의 폐지가 논의되고
있으며 장차 家族제도의 뿌리마저 解體되고
散逸되어 버리는 위기상황의 到來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시점에서 바야흐로 이번에
편찬될 甲申大同譜야말로 우리들 ○○○門의
소중한 家寶처럼 오래오래 간직되고 보존되기를
바라면서 끝으로 五十餘日간에 걸쳐 어려운
여건이었음에도 합숙을 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교정과 편집에 수고하여
주신 各派에서 선발된 九人 편집위원 여러분의
노고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